시립박물관의 이번 전시는 현재를 살아가는 인천 시민에게 배다리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연속과 단절’이라는 주제로 배다리의 역사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생생히 볼 수 있었다.
“‘배가 닿던 곳’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 ‘배다리’는 이른바 배다리 철교를 중심으로 하는 동구 금창동과 송림동, 중구 경동 일대를 가리키는 공간이다. 배다리라는 이름은 송현동 갯골에서 흘러드는 물길을 따라 배가 닿았다 하여 불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행정지명이 아닌 탓에 정확히 그 범위를 규정하긴 어렵지만, 배다리 철교와 중앙시장, 그리고 헌책방거리를 잇는 삼각형의 주변지역을 통칭하여 배다리로 부르는 것이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
“1899년 개통된 경인철도는 교통수단의 기능 외에도 일본인과 조선인의 공간을 구분 짓는 경계선이 되어 버렸다. 철교를 기준으로 남쪽 싸리재 일대를 배다리 안, 북쪽 쇠뿔고개 초입을 배다리 밖이라 불렀다. 안과 밖이라는 모호한 경계 속에는 경인철도를 기준으로 중심지와 주변지, 일본인 거리와 조선인 거리를 구분하려는 당시의 인식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개항 이후, 개항장과 주변 지역은 질서정연한 근대도시로 변모해간다. 인천을 그들만의 도시로 만들고자 했던 일본인들은 자신들만의 학교, 신사, 상점과 은행, 자본이 투입된 대형공장을 건설해가면서 조선인들의 공간을 침탈해갔다. 그리고 삶의 터전을 빼앗긴 조선인들은 철도 밖, 배다리 일대로 밀려나야 했다.”
“배다리 주변의 마을도 그렇게 형성된 가난한 조선 사람들의 공간이었다. 그 공간에 조선인을 위한 학교가 들어서고, 막걸리공장이 세워지고, 조선 사람들의 장터가 형성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시절 가난했지만 안녕했던 배다리는 인천 사람의 1/3이 모여 살던 동구의 중심지였다. 눈부신 경제발전으로 도시가 팽창하면서 깨끗한 환경, 새로운 주거지가 생겨나고, 사람들도 하나 둘 떠나기 시작했다. 늘 북적대던 상점들도 문을 닫았다. 사람이 오가던 공간은 적막하게 변해갔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 추진된 개발사업은 남겨진 사람들의 마음에 생채기를 남겼다.”
“물리적으로 갈라진 도로부지에 마을을 이어주는 텃밭이 만들어졌듯이, 상처 난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안녕한 배다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전시회를 설명하는 마지막 문구는 오늘날 인천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에게 여러 시사점을 남긴다.
원도심에 대한 애틋한 마음과 동시에 ‘상생’에 대한 성찰을 하게 만드는 계기였다.
글 : 인천시립박물관
사진 : 이광민(사업지원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