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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역사를 담아내다

작성자
admin
작성일
2015-11-30 18:17
조회
320



마을의 역사를 담아내다

정찬식 주민자치위원장 인터뷰





산곡동 사택?

‘영단주택’ 이라고도 부르는 산곡동의 사택 단지는 일제강점기 때 조성된 이래 긴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을에 남아 있는 주거 단지다. 당시 군수물자를 만드는 조병창이 부평에 세워지면서(1939) 이곳에 근무할 사람들이 집단으로 이주할 곳이 필요해졌고, 그에 따라 사택지를 조성하게 된 것이 이곳의 유래라고 한다.

부평 일대는 일제강점기 최대 군수기지였다. 자연히 해방 이후에는 미군이 조병창에 주둔하게 되었고, 사택에는 관련 종사자들이 살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산업화의 바람과 함께 공단이 속속 들어서기 시작했고, 이곳에 취직하기 위해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사택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옛 마을을 추억하다

“열다섯, 열여덟 살짜리 애들도 보따리 하나 달랑 메고 기차에 올라 도착했던 곳, 산곡·청천동은 그렇게 정착하신 분들이 살아온 곳이에요.” 1974년, 정찬식 위원장은 산곡동에 처음 왔을 때를 떠올렸다. “우리네 형 누나 삼촌들 모두 그렇게 일을 찾아서 이곳에 왔지요. 그 사람들이 사택에서 살았어요. 해방 전에는 계획 하에 주택을 조성했으니까 관련된 사람들이 사원주택처럼 살았겠죠? 그렇게 예부터 살던 사람들과 객지에서 올라온 분들이 함께 살아가게 된 거죠.”

70~80년대 산곡동은 상당한 번화가였다. 마을이 북적거렸던 것은 대우자동차 공장, 지금 롯데마트 자리에 있었던 한국종합기계, 조금 아래에 점방이라는 방직회사 등 크고 작은 공장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퇴근시간이 되면 골목에는 사람들이 채일 정도로 많았어요. 지금 같으면 이런 마을에 극장이 있다는 게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겠지만, 당시 백마극장에는 사람들이 줄을 섰었죠. 지금도 극장 터가 남아있어요. 이 동네에 50년, 60년째 영업 중인 가게들이 있거든요. 대를 이어서 다방, 철물점, 전파상을 운영해 오셨죠.”





반세기 역사를 담고 있는 마을의 장소

“흐르는 세월과 함께 동네의 모습은 변화하기도, 일부 사라지기도 했지만 사택만큼은 오랫동안 그 자리에 남아 있었어요. 아마 단순 개발을 위해 논두렁 위에 아파트를 지은 게 아니라서 그런 것 같아요. 사택이 가진 효용성이 일제시대나 미군정을 지나오는 동안에도 자기 자리를 지켜가게 했고, 그때의 역사가 지금 사택과 함께 고스란히 마을에 남게 된 거죠. 주변 아파트 몇 채를 제외하고는 동사무소 주변이 전부 60~70년 된 마을 형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요. 오래된 가게들이 꾸준히 영업을 하고 있다는 것은 70년 전의 시간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기도 해요.”

“이 주택은 일본에 협력하는 한국인 건축주가 지었다고 해요. 외관이 일본풍인데, 당시 일본에도 이런 집들이 많았대요. 내부는 13~14평 정도로 되어 있어요. 당시 주거형태로 보면 좁지도, 넓지도 않은 데다 들어가 보면 그냥 막 지은 집이 아닌 걸로 봐선 여기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수준은 그래도 먹고 살만한 도시노동자들이 가정을 이루고 살았던 것 같아요. 방 2~3개에 부엌이 딸린, 하늘이 보이고 장독대도 있는 같은 모양의 집들이 줄줄이 붙어 있는 모양새에요.”



도시의 흥망성쇠

그러다 대공장들이 이사를 가기 시작했고, 노동자들도 일자리를 찾아 점점 마을을 떠났다. 마트가 들어오면서 거대했던 재래시장엔 점포 다섯 개만 남았고,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는 등 실제 생활이 불편하다 보니 아이들 키우는 집들도 이사를 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개발 소식이 마을에 찾아왔어요. 외지 사람이 투자 명목으로 집을 구입하기 시작하면서 집값은 7~8배씩 폭등했고, 불편해도 저렴한 값에 소박하게 살던 사람들이 전월세 값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나가게 됐죠. 건물은 더 낡아 가는데, 집값은 너무 비싸지고, 투자자가 살지도 못하고, 재개발도 안 되고, 시세대로 전세도 안 나가니까 450호 중 200호는 빈 집이 되었어요. 그렇게 점점 공동화 현상이 심화되는 중이죠.”

“예전에는 한 학교에 초등학생이 1500명 정도 있었는데, 지금은 300명 정도만 있어요. 그러니 도심에서 시골과 같은 공동화 현상이 일어나요. 대낮에도 밤처럼 거리에 사람들이 없어요. 11월에는 동네에 하나 남은 병원이 문을 닫았는데요. 그럼 그 주변의 약국도 곧 문을 닫을 수밖에 없어요. 동네에는 노인이나 혼자 사는 분들이 많은데, 더욱 살기 불편해지는 거죠.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보통 시골에 살지 않으려는 이유가 의료, 교육 등의 기반시설과 떨어져 있어서잖아요. 마을조사를 시작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도시는 언제 쇠락하는지 알기 위해서였어요.”


  

   


산곡동 사택을 저장하라!

“언젠가는 재개발이 되겠지만, 일차적으로는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상황을 나아지게 만들 기회나 방법이 없을까? 그리고 어쨌든 없어질 도시이지만 현대사적으로 도시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리해 보고 싶었습니다. 도시는 언제 형성되고 사라지는지, 한 시대의 주거형식은 어떻게 생겨나고 없어지는지 알고 싶었죠.”

“먼저 주민자치위원회 회의에서 어떻게 해볼지를 논의했습니다. 노인층도 많고. 생활도 열악한데다 비어있는 집들이 많은 이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고요.” 그렇게 소멸되어 가는 마을을 기록하는 작업이 시작됐다. “부평구가 예산이 있어서 지금의 주택을 보전하거나 그럴 입장은 아니었기에 더더욱 주민자치위원회 차원에서 해결해보자는 결정을 하게 된 겁니다. 고민하던 중에 마을공동체 공모사업을 활용하게 되었죠.”

먼저 주민자치위원, 통장들이 팔을 걷어붙였다. 이어서 마을에서 살아갈 다음 세대와 함께 조사를 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렇게 명신여고와 연결된 팀은 먼저 부평역사박물관의 협력을 얻어 주택의 역사, 미래와 관련된 교육을 받았다. 다음은 명신여고 동아리에서 4팀을 나누어 3회 정도 마을을 돌아다니며 집 구조, 골목을 관찰하고,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도 진행했다. 연말엔 주민들이 직접 준비한 골목 사진이나 집 구조 영상을 공유하고, 최종적으로는 자료를 모아 작은 책을 만들 예정이다.





삶에 대한 시선

역사 기록 작업은 지역 자치조직, 학교, 역사박물관의 자원들이 모여서 만들어졌다. 박물관이 가진 축적된 자료를 활용해 주민교육을 열어 사택의 역사성과 중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 과정에서 학생들은 고민 없이 매일 지나다녔던 길, 일상을 살아가는 동네에 대해 애정을 갖게 되었다.

“저희 동네가 구도심 중에서도 노인층 인구가 많은데, 이 작업을 통해 개발 이후 사람들의 삶은 어떻게 할 것인가 까지 담았으면 좋겠어요. 주거환경이 열악하니 살기는 나쁘지만, 그 조건에서 살 수밖에 없는 분들도 계시거든요. 우리가 찾는 것은 크게는 주택에 대한 역사여도, 더 중요한 것은 그 속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에 대한 역사에요. 개발이 된다면 반세기 넘게 살아왔던 모습도 사라지고, 힘겹게라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도 보장할 수가 없게 되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정리를 해보자고 한 거예요. 우리가 전문가처럼 마을의 형태나 사회변천정도 수준을 정리하지는 못하지만, 주민의 입장에서 이 마을의 태동과 거의 마지막인 모습들을 바라볼 필요가 있지 않나, 함께 살았던 이웃들이기 때문에 더 내밀하게 알 수 있지 않을까 해요.”



※ 아래는 일문일답.


Q) 한 동네에서 40년, 마을의 변천사를 지켜보면서 감회가 남다르셨을 것 같습니다.

A) 예전 이곳은 아주 활기찬 동네였다. 산곡초만 가지고 학생들을 전부 수용할 수가 없어서 산곡북초, 마곡초를 만들어 분가를 할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요즘은 학교 당 전교생이 300~400명밖에 되지 않는다. 아마 내년 신입생이 50명을 넘지 않을 거다. 그렇게 도시 속 분교가 되어가고 있다. 지금 수준이 면 소재지 학교밖에 되지 않는다.

현재 동네의 재개발 지정구역이 6곳이다. 예를 들어 시장을 활성화시켜보자고 시나 구에 제안해도 재개발 블록 때문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투자를 하지 않으니 자연히 소멸되어 가는 것이다. 주민은 대안이 재개발뿐이라고 하지만, 재개발 이후 더 이상 갈 곳 없는 사람들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있다. 여기서 나가면 인천에서 더 갈 수 있는 곳이 없다. 사람들은 재개발이 되면 예전의 마을처럼 복원될 수는 없어도 도심으로 다시 편재가 되지 않을까,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있는 것 같다. 다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지금까지의 도시개발이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이 더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마을을 발전시키는 방향이 아니라 사람들의 공동체적인 삶을 다소 희생시키더라도 경제적인 부를 계속 많이 만들어 왔다고 생각한다.

어제는 자치센터와 통장단이 이틀간 김장을 해서 만든 김치 800포기를 250명의 어르신들께 전해 드렸다. 이 동네는 다른 곳 보다 자원봉사자도 많고, 워낙 옆집 앞집에서 오래 알고 살아서 옛정이 많다. 도시가 인위적으로 급격히 아파트로 변하지 않아서인지 공동체의식이 강한 것 같다. 도시가 아파트 단지로 변하면 이런 아기자기한 면도 없어질 거고, 개발이 안 되고 계속 이렇게 유지되면 점점 더 낙후될 것이다. 어려운 문제다.


Q) 무엇부터 하면 좋을까요?

A) 주민자치위원회에서는 외에 을 만드는 일을 진행 중이다. 단순히 요리를 할 공간을 만들자는 게 아니라, 어른들이 잘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면서 동네 사람들과 음식, 재능을 나누어 보자는 것이다. 공간이 만들어지면 고추장, 된장 같은 것들을 만들려 한다. 마을에 이런 기술이 한번 축적되면 주민들이 주택 옥상에서 고추도 말리고, 반찬 등을 여유 있게 만들어서 이웃과 나눠 먹을 수 있겠다.

산곡1동에서는 다른 동에서 안하는 일들을 제안하고 있는 것 같다. 시나 구에서 공모사업을 하면 대부분 축제나 행사, 벽화 사업을 많이 하는데, 산곡동은 벽화사업을 열 번 정도 하면서 마을의 자원봉사자들이 스스로 하게 되는 부분이 생겼다. 그래서 이제는 내부를 살찌우는 것들을 고민해 보게 되었다. 동네 주방 개념은 동네 공동체를 좀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우리 동네의 역사성이나 살아온 사람들에 대한 인식을 같이 해보는 것과 맞물리면 긍정적일 수 있겠다.

작년에는 주방도 없이 막걸리 교실을 6회 과정으로 연 적이 있다. 주민들이 만들고, 먹는 것들을 좋아하시더라. 동네 주민센터 프로그램을 하면 대부분 50대 이후가 많이 오시는데 막걸리교실을 여니까 실제로 옆 아파트에 사는 외국인 주방장, 젊은 주부들이 찾아와서 같이 담근 술을 마을행사 때 나누어 마셨다. 그래서 앞으로 동네가 어떻게 변하던 간에 동네 주방을 하면서 이런 일들을 늘려 나갈 수 있겠다.

마을마다 상황이 다르지만 산곡동의 상황에서는 벽화 몇 개 그리는 것 보다는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는 것, 사는 사람들의 현실을 보는 것, 이것을 주위에 알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다. 주민들이 하는 거라 더딜 수밖에 없고. 정리의 한계 같은 부분이 있겠지만 나름대로 해 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Q) 이런 활동을 이어가게 만든 개인적인 동기는 무엇인가요?

A) 지금 이 일들이 활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이 동네에 살면서 밥벌이를 동네에서 해 나가고 있고, 그래서 내가 할 수 있고 동네사람들과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고민하며 주민자치위원 일을 시작했다. 동네에서 봉사하시는 분들은 저보다 더 훌륭한 분들이 많은데 어쨌든 애정이 있으니 주민자치위원을 하는 것 같다. 주민들이 1회성 행사·사업에는 익숙한데 지금처럼 준비하고, 공부하고 만들어 나가는 사업은 많이 해보지 않았다. 차근차근 이어가려 한다.


Q) 공모사업을 진행하시면서 어떠셨나요?

A) 이런 사업을 처음 해봤다. 주민자치위원들이 다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실제로 이걸 시작하기 전에는 기대가 많았다. 그런데 준비된 것들도 부족하고. 어떻게 해야 될지를 고민하다가 두세 달을 낭비해 버렸다. 8월 이후부터 구체적으로 체계를 잡게 된 것이 아쉽다.

주민들 사이에서 사택 중 상징적인 것들은 한 채나 두 채 정도를 좀 보수해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실제로 인천에는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문화적 유산들이 많은데 보존까지는 아니더라도 관심을 좀 가질 수 있는 계기로서 좋을 것 같다.

사택을 조사하면서 집안에 직접 들어가 보니까 연말이면 각 사회단체에서 가난한 동네에 지원하는 연탄이 몇 만 장이 들어오는데 정작 어르신들이 혼자 살면서 연탄이나 화덕 없이 전기장판 하나로 살고 계신 분들이 많더라. 이런 부분들이 행정력으로 뒷받침되어 전해졌으면 좋겠다. 개발이 될 때는 되더라도 동네나 그밖에 여러 곳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대한 따뜻한 시선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사업을 계기로 모임이나 지속적인 관계를 많이 넓혀 갔어야 했는데 사업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일반 주민 차원으로 넓혀 가는 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주민자치위원 외에도 동네 분들이 함께 고민해줬다면 더 좋은 성과들이 나타나지 않았을까? 어쨌든 주민자치가 동네 조직이니까 일반 학교나 단체 보다는 더 친밀하게 동네를 볼 수 있다. 더 개방적으로 집안을 보게 한다던가, 오래된 사진을 스스럼없이 건네주시는 것 같은. 그게 긍정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500호 정도의 작은 동네지만 이것을 따뜻하게 보듬는 시선들이 만들어진다면 시에서 지원하는 비용 이상의 가치가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Q) 결과물로 나올 책이 기대가 되는데요.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A) 학생들, 주민들의 시각으로 동네를 바라보고, 인터뷰한 결과물이 될 것이다. 아마 특별히 오래된 공간을 소개한다거나 주민 인터뷰를 담지 않을까. 덧붙여 마을의 사진을 찍은 것이 담길 것이다. 편집 능력은 부족하지만 탁월한 작품이 아니어도 카메라를 통해 본 시선을 주민에게 공유하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인 것 같다. 6개월간의 작업을 공유하는 자리를 가질 예정이기도 하다. 부족하지만 주민, 역사박물관, 학교가 같이 동네 알기, 동네 바로보기 이런 정도로 한 일로서는 괜찮지 않을까 한다.



참고 : [동네 인문학] 마을, 다시 마을이 되다

         http://incheonmaeul.org/b/magazine/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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