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곽현근(대전대학교 행정학 교수)
머리말
‘공공가치의 공동창출’(co-creation of public value)이 포스트코로나 시대 행정 분야의 패러다임으로 부각하고 있다. 공공가치 공동창출의 핵심 의제 중 하나는 정부가 ‘누구와 함께’ 공공이 바라는 소중한 가치를 생성하는가의 문제다. 주민의 피부에 구체적으로 와닿는 문제해결이 공공가치라는 실용적 관점의 공동창출 패러다임은 현장의 주민 목소리와 실천 행위에 주목한다. 생활 현장의 주민 목소리를 조직화하고 집합적인 실천 행위를 끌어내는 단위이자 공동창출을 위한 지방정부 파트너로 부각하는 주체가 ‘지역공동체’(local community)이다.
공공가치 공동창출을 위한 지역공동체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현재 진행되는 공동창출 담론은 기존의 지역공동체의 학술적·제도적 노력과는 별개로 전개되고 있다. 본 연구는 최근 지방자치 학계에서 전개된 지역공동체의 학술 및 제도화 노력이 공동창출 이론과 접목되면 좀 더 탄탄하고 효과적인 현장 중심의 민주적 거버넌스가 구축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또한 본 연구는 공공가치의 공동창출이 자칫 정부에 의해 일방적으로 구조화된 환경에서의 지역공동체 관여에 머무르는 경우 기존의 형식적인 수준의 참여를 벗어날 수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초대된 공간’(invited space)으로 상징되는 정부의 참여제도는 정부 정책 또는 사업의 합리화 또는 주민들을 포섭하는 도구로 전락하거나 상징적인 제도에 머무를 가능성이 크다. 초대된 공간이 정부의 동원 또는 전시(展示)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정부의 권위에 질문을 제기하거나 대등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적 이성’(public reason)을 갖춘 준비된 주민을 필요로 한다. 준비된 주민 역량은 정부의 경계 밖에서 주민들이 자기조직화를 통해 사회적 관심사를 발견하고 문제해결 방안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키워질 수 있다. 정부와는 독립적으로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의사소통을 통해 사회적 책임 의식과 집단적 역량 및 효능감을 키울 수 있는 활동무대를 ‘민초의 공간’(popular space)이라 부른다(Conwall, 2004). 공공가치 공동창출은 초대된 공간뿐만 아니라 민초의 공간의 활성화, 그리고 두 공간 사이의 적절한 연계와 균형 및 조화를 통해 달성할 수 있다.
민초의 공간과 초대된 공간을 연계하는 원리로서 지방자치 분야의 ‘보충성(subsidiarity)의 원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보충성의 원리는 지역사회의 문제해결을 위한 행동의 우선권이 민초의 공간에 주어져야 함을 상기해준다. 나아가 민초의 공간에서 주민들의 역량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지방정부의 개입이 정당화되는 상향적 지방자치의 논리를 제공해준다. 보충성의 원리에 따르면, 정부가 아니라 지역공동체의 요청에 따라 공동창출의 초대된 공간이 열릴 수 있다.
보충성 원리에 기초한 공공가치 공동창출을 위한 제도화의 출발점으로 현재 읍면동 단위에서 제도화가 진행되는 주민자치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10년 제정된 「지방행정체제개편에 관한 특별법」에 근거를 두고 출범한 주민자치회는 다양한 제도와의 접목을 통해 진화하면서 풀뿌리민주주의를 위한 제도적 생태계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구체적으로 마을계획, 주민총회, 주민참여예산제, 주민세, 리빙랩, 사회적경제조직화 등의 연계 노력은 읍면동 단위의 ‘지역공동체주축조직’(community anchor organization) 또는 ‘협력적 플랫폼’으로서의 주민자치회 위상을 쌓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주목할 것은 주민자치회와 연계된 다양한 제도들이 공공가치 공동창출 패러다임에서 제안하는 제도적 장치들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주민자치회를 둘러싼 풀뿌리민주주의 제도적 생태계 조성 노력이 새롭게 부각하는 행정 패러다임의 제도적 기반이 될 수 있음을 충분히 인식하고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연구는 공공가치 공동창출의 기본 개념을 소개하고, 지역공동체의 참여 공간을 ‘민초의 공간’과 ‘초대된 공간’으로 구분한 후, 보충성 원리의 관점에서 두 공간의 연계를 통한 공공가치 공동창출의 접근방식을 제안하고자 한다. 또한 공공가치의 공동창출의 관점에서 현재 읍면동 주민자치회의 제도적 구성을 진단해보고, 주민자치회 주도의 지역공동체의 공동창출을 위한 역할모형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공공가치 공동창출을 위한 지역공동체 참여 공간의 분류와 연계
- 공공가치 공동창출의 개념
공공가치는 ‘공공이 가치를 두는 것’이다(Bennington, 2007). 전통적인 행정은 정치인의 목적설정, 전문가의 정책분석 및 전문적인 기준과 같은 관행에 따라 정부가 일방적으로 공공서비스의 가치를 정의하고 결정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반면, 공공가치의 관점은 ‘공공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를 부각함으로써 공급자 중심의 행정관행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한편, 공공가치의 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주민은 공공서비스의 단순 소비자가 아닌 사회적 책임 의식과 적극적 시민성을 갖춘 주민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주민은 개인 선호의 만족을 넘어서서 집합적 수준의 바람직한 목적 달성 여부에 관심을 가지는 ‘사회적 효용함수’를 가진 시민이다. 결국 공공가치는 주민들이 상호의존성을 인식하고 개인의 세계를 뛰어넘어 하나의 사회 또는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부여하는 가치를 의미한다.
공공가치 공동창출의 관점은 서비스의 우선순위, 설계, 전달, 평가를 포함한 광범위한 정책 과정과 결과에 관여하는 주민들을 강조한다. Ansell and Torfing(2021: 6)은 공동창출을 “상호의존적인 광범위한 행위자들이 공동의 문제를 정의하고 새롭고 더 나은 해결책들을 설계하며 집행하기 위해 경계를 교차하는 협력에 관여하는 과정들”로 정의한다. 최근 Kitchener et al.(2023: 2)은 공동창출을 “둘 또는 그 이상의 공공 및 민간 행위자들이 지식과 자원의 건설적인 교환을 통해 공공가치를 향상하려는 협력적인 문제해결 과정”으로 정의한다.
공공가치의 공동창출 과정은 공동코미셔닝(co-commissioning). 공동설계(co-design), 공동전달(co-delivery), 공동평가(co-assessment)의 네 가지 양식으로 분류된다(Bovaird and Loeffler, 2017). 첫째, 공동코미셔닝은 사회에서 요구되는 공공서비스를 확인하고 우선순위를 정하는 단계의 주민참여를 강조한다. 둘째, 공동설계는 ‘디자인씽킹’와 같이 서비스 사용자 또는 지역공동체의 경험을 공공서비스 설계에 접목하는 데 초점을 둔다. 공동설계는 서비스 사용자 또는 지역주민들보다 공공서비스 설계방식에 관하여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셋째, 공동전달은 공공서비스 향상을 목적으로 공공조직 전문가와 서비스 사용자 또는 지역공동체가 협력적 방식으로 서비스 전달 과정에 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넷째, 공동평가는 공공서비스 모니터링과 평가에 초점을 두고, 공공서비스 전문가와 주민들이 함께 서비스 질, 문제 또는 개선사항들을 평가하는 활동을 의미한다. 아래 <표 1>은 공동창출 양식의 구체적인 방식들을 보여준다.
공동창출 양식(Modes) |
예시 |
기제 |
공동코미셔닝
(co-
commissioning) |
정책의 공동기획
(co-planning of policy) |
숙의적(deliberative) 참여
마을계획(community planning)
주민의회(citizens assembly) |
주민
목소리
(voice) |
서비스 우선순위 결정
(co-prioritization) |
주민참여예산제
개별예산(personal budgeting) |
서비스 공동재정지원
(co-financing) |
마을의 기금모금
크라우드 펀딩(crowd funding)
세금인상 동의 |
공동설계
(co-design) |
사용자 포럼
서비스설계실험실 (service design labs)
고객여정지도 (customer journey mapping) |
주민
목소리
(voice) |
공동전달
(co-delivery) |
서비스 공동관리
(co-management) |
공공자산(도서관, 코뮤니티센터, 운동시설 등)의 공동체 관리
학부모위원회 |
주민행위
(action) |
서비스 공동수행
(co-performing) |
동료지지집단(peer support groups)
간호사-가족 파트너십
자경단(neighborhood watch) |
공동평가
(co-assessment) |
임차인 검사관(tenant inspectors)
사용자 온라인 평가
참여적 마을 진단 |
주민
목소리
(voice) |
자료: Loeffler and Bovaird(2019: 244)를 일부 보완
- 공공가치 공동창출을 위한 참여 공간의 분류와 연계
1) 공공가치 공동창출과 ‘보충성’의 원리
<표 2>는 공공조직과 지역공동체의 적극적 또는 소극적인 행위의 조합에 기초한 서로 다른 서비스의 생산방식을 보여준다. 표에서 보여주듯이 이론상 공공조직과 지역공동체의 관여 모두가 적극적일 때 공동창출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것이 공공조직과 지역공동체 모두에게 똑같은 수준의 헌신과 공헌을 요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공동창출을 위해서는 공공조직과 지역공동체가 서로 다른 수준의 자원, 역량 및 전문성을 보유하고 있음을 충분히 인지할 필요가 있다. 공동창출의 핵심은 공공조직이 지역공동체를 단순 만족의 대상 또는 동등한 역할을 위한 대상이 아니라 ‘함께 행동하며’(doing with) 지역사회의 소중한 가치를 창조하는 동반자로 바라보는 것이다.
|
지역공동체 관여(Engagement) |
높음(적극적) |
낮음(소극적) |
공공조직 및 전문가의 관여 |
높음
(적극적) |
공동창출 |
전통적 서비스 제공 |
낮음
(소극적) |
자조(self-help) 또는 자기조직화
(self-organizing) |
서비스 제공이 없음
(서비스 및 공동체 실패) |
자료: Loeffler(2021: 52)
공동창출의 전제조건으로서 주목할 범주가 <표 1>에서 ‘자조(自助) 또는 자기조직화(self-organizing)’에 해당하는 범주이다. 자기조직화는 공공조직이 공공가치 또는 서비스 창출에 소극적인 데 반해 주민들이 상대적으로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를 의미한다. 자기조직화는 공공조직에 의해 필요한 공공서비스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경우 지역사회 주민들이 주도적으로 자발적인 결사체의 구성과 활동을 통해 해당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음을 뜻한다. 좀 더 일반적으로 주민들이 사는 지역을 중심으로 자발적인 조직화 또는 네트워크 구축을 통해 공동체성과 집단 역량을 키우고, 그 역량의 기반 위에 지역 의제를 스스로 발견하고 해결해가는 것을 지역공동체의 ‘자기조직화’라고 부를 수 있다.
<표 2>의 네 가지 공공서비스 범주는 상호배타적으로 나타난다. 상호배타적인 서비스 생산의 접근방식을 연계하며 일련의 질서를 부여할 수 있는 방식이 바로 ‘보충성(subsidiarity)의 원리’이다. 공공사무 또는 기능 배분의 원리로서 보충성 원리는 ‘민간이 처리할 수 있는 경우에 국가공동체가 관여해서는 안 되며, 가까운 지방정부가 처리할 수 있는 업무를 상급 지방정부나 중앙정부가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으로 알려져 있다(유민봉, 2023: 374).
보충성의 원리는 공공서비스 생산이 공공부문이 아니라 지역공동체(또는 주민)로부터 출발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즉, 보충성의 원리에 따르면, 주민의 자기조직화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사회문제 또는 서비스의 생산은 주민들에게 일차적으로 맡겨져야 한다. 주민의 역량만으로는 해결이 어렵더라도 정부의 지원과 협력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사회문제나 서비스는 공동창출의 방식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주민의 관여가 불필요하거나 문제의 성격상 온전히 전문가에 의해 해결해야 하는 경우 전통적인 관료제 중심의 접근방식이 요구된다. 즉, 보충성의 원리는 자기조직화 → 공동창출 → 전통적 공공서비스의 순으로 공공서비스의 생산방식을 보충해나갈 것을 요구한다.
공공가치 공동창출의 접근방식은 자칫 주민의 참여 공간의 초점을 정부 내부의 공식적인 참여제도에만 맞추게 되는 위험성을 가진다. 보충성의 원리는 공공서비스를 위한 주민참여가 정부의 공식적인 정책 결정과 집행의 수준을 넘어 주민들이 주도적으로 공동 목표를 발견하고 직접 해결에 관여하는 자기조직화의 차원까지도 포함해야 함을 상기시켜준다. 공동창출 양식에 포함된 마을계획, 주민참여예산제, 사용자포럼, 자경단, 참여적 마을 진단 등과 같은 활동은 주민의 ‘생활세계’(life-world)에 뿌리를 두고 공통의 관심사를 발견하고 해결하는 다분히 주민의 자기조직화의 성격을 띠는 참여이다. 주민이 주도되는 생활세계 중심의 활동은 정부의 공식 정책의 결정 또는 집행과정에 초대되어 수행하는 주민의 활동과는 차별화된다. 보충성의 원리는 자기조직화와 공동창출을 위한 서로 다른 활동무대 또는 참여 공간에 관한 논의로 확장될 수 있다.
2) 참여 공간의 분류와 보충성 관점의 연계
(1) 생활세계의 자기조직화를 위한 민초의 공간
자기조직화는 주민들이 자신이 사는 지역을 중심으로 조직화 또는 네트워크화를 통해 공동체성과 집단적 역량을 키우고, 그 역량을 활용해 지역의 의제를 스스로 발견하고 해결해가는 것을 의미한다. 생활세계에서 펼쳐지는 주민들의 자기조직화의 활동무대 또는 참여 공간을 포착하기 위하여 다양한 개념들이 제안되어왔다. ‘민초의 공간’이 대표적이다(Cornwall, 2004; Taylor, 2007). 민초의 공간은 주민의 자발적 노력을 통해 형성되고 소유되며 통제되는 공간으로서 정부와는 무관하게 서비스를 생산하거나 정부 정책에 항의하는 주민들만의 참여 공간 또는 활동무대를 의미한다. 주민들은 민초의 공간에서 주민 조직화 또는 네트워크화를 시도하고 상호연대를 형성하면서 정부와는 무관하게 자신들만의 의제 발굴과 해결을 위한 다양한 지역사회 활동을 전개할 수 있다.
(2) 정부의 공식 참여제도로서의 초대된 공간
초대된 공간은 정책 과정에서 주민참여 또는 지역공동체와의 협력을 목적으로 정부가 주민에게 제공하는 공식적인 참여제도를 의미한다. 초대된 공간은 전통적으로 정치인과 관료의 폐쇄적 세계를 주민에게 개방하는 정책변화를 의미한다. 또한 상호 독립적인 공공기관 영역과 주민만의 활동무대(민초의 공간) 사이에 공식 참여제도를 도입해 지역주민의 공적인 활동무대를 열어준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Chanan, 1999). 주민들은 개인 수준 또는 지역사회 조직 또는 대표로서 공식적으로 ‘초대된 공간’에 참여하게 된다. 하지만 초대된 공간이 마련되더라도 지역공동체 조직 또는 대표는 민초의 공간에 머물면서 반드시 정부의 초대에 응할 필요는 없다.
전통적인 주민참여 이론과 차별화되는 공동창출 관점의 초대된 공간은 더 이상 정부 혼자의 힘으로 현대사회의 ‘난제’(wicked problems)를 해결할 수 없다는 반성에서 출발한다. 공동창출은 현대사회의 새로운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주민 자원과 역량의 활용이 필수적이라는 인식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공동창출의 관점에서 초대된 공간의 제도들은 현대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공공서비스 기획과 전달을 담당하는 공공기관, 그리고 주민의 경험 및 수요를 대변하거나 공공기관과 함께 문제해결에 관여하는 사회집단 사이의 ‘건설적인 공존’의 마당을 여는 의미가 있다. 주민들은 초대된 공간에서 정책에 아이디어를 보태고 집행에 참여하거나 모니터링하고 감시하는 데 직접 관여함으로써 공공기관의 ‘사회적 책무성’을 강화하고 정부의 신뢰와 정당성을 높이는 데도 공헌한다.
(3) 보충성 관점의 참여 공간의 연계
초대된 공간으로부터 독립적인 민초의 공간을 분리해 강조하는 이유는 정부의 참여제도가 주민참여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은 아니라는 반성 때문이다. 주민참여의 초점을 초대된 공간에만 맞추고 민초의 공간을 소홀히 다룰 때, 주민 스스로 조직화와 참여를 통해 사회문제 해결과 공공서비스 생산에 공헌할 수 있는 역량 형성과 활용의 잠재력을 놓치게 된다. 민초의 공간의 존재 및 초대된 공간과의 연계는 다양한 측면에서 초대된 공간 중심의 전통적인 주민참여이론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 공헌할 수 있다.
많은 경우 자신의 활동 기반 없이 주민들이 초대된 공간에 참여하는 경우, 정부에 포섭되어 정부가 상정한 의제를 합리화하는 도구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민초의 공간의 경험과 지지를 얻은 지역사회 리더 또는 활동가가 초대된 공간에 참여하는 경우 좀 더 주민의 의제가 무게감 있게 다루어지거나 쌍방의 의제가 좀 더 균형 있게 다루어질 가능성이 크다. 민초의 공간과 연계된 초대된 공간은 주민의 생생한 경험과 현장 지식이 정책과 사업의 설계, 전달 및 모니터링에 접목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초대된 공간은 주민 스스로 도출한 의제에 대하여 정부의 지원 가능성을 논의하는 의사소통의 장치가 될 수 있다. 또한 초대된 공간은 정부와 지역사회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거나 해결하기 위한 소통과 이해의 무대로서 기능할 수 있다.
초대된 공간에서의 공동창출은 민초의 공간에서의 주민 활동의 한계를 극복한다는 의미가 있다. 주민 스스로 생성한 폐쇄된 네트워크에만 의존하면서 참여가 민초의 공간에만 머문다면, 주민조직 간 또는 지역사회 간의 파벌화 또는 지역이기주의(NIMBY)의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또한 주민들의 자기조직화를 통한 지역의 문제해결 방식이 ‘그럭저럭 생활하기’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더 많은 자원, 정보 또는 공적 권한을 가진 정부 또는 다른 지역사회와의 협력을 통해 지역이 ‘앞서 나가기’ 위한 기회는 놓칠 수 있다. 초대된 공간은 정부의 서비스에 대한 불만과 불신 때문에 형성될 수 있다. 이 경우 민초의 공간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의존은 정치적으로 대의적 정당성을 가진 정부 자체를 부정하거나 거부하게 되면서 커다란 공공갈등 비용을 발생시킬 수 있다. 반대로 정부가 의도적으로 민초의 공간에 더 많은 책임과 의무를 전가하면서 정부의 책무를 회피하고 소홀히 하는 도덕적 해이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아래 <그림 1>은 보충성 원리에 따른 주민참여 공간의 연계와 서비스 공급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 > 주민참여의 공간과 보충성의 원리 | 자료: 필자 작성
공공가치 공동창출 원리의 주민자치회 제도화 적용
- 지역공동체주축조직의 개념과 역할
제도적 관점에서 지역공동체 형성과 참여를 위한 매개체가 되는 것이 지역공동체조직(community organization)이다. 지역공동체조직의 중요한 기능의 하나가 주민들 사이의 사회적 자본의 형성이다. 대부분 지역공동체조직은 비슷한 관심사 또는 이해관계를 가진 주민들이 ‘결속형’ 사회적 자본을 형성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내부 결속에만 집착하는 결속형 공동체조직은 자칫 다른 공동체조직에 폐쇄적이며 적대적일 수 있다. 폐쇄성을 벗어나서 다양한 지역공동체조직 사이의 교류와 연계는 각각의 공동체들이 가지는 자원과 역량을 한데 묶어 개별적인 것보다 더 높은 성과를 거두는 데 공헌할 수 있다. 비록 약한 유대라 하더라도 서로 다른 공동체조직 사이의 ‘가교형’ 사회적 자본의 형성은 외부 기관에 대해서 공동의 강력한 목소리를 내는 데도 도움이 된다. 마지막으로 지역공동체조직은 정부가 마련한 제도참여 등을 통해 지역주민의 관심사를 정부에 전달하거나 정책 과정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정부의 동반자 역할을 하면서 ‘연계형’ 사회적 자본의 형성에도 공헌할 수 있다.
대부분 지역공동체조직은 결속형에 머무를 가능성이 크다. 이상적으로 볼 때 지역공동체조직이 지역사회발전의 제도적 자산이 되기 위해서는 결속형을 넘어서서 가교형과 연계형 사회적 자본 형성의 매개체로 진화해나갈 필요가 있다. 즉, 지역공동체발전의 관점에서 지역공동체조직은 일차적으로 결속형 사회적 자본에 초점을 두되, 가교형으로 ‘확장하고’(reach out), 연계형으로 ‘확대하는’(scale up) 전략이 요구된다(Taylor, 2011). 하지만 모든 지역공동체조직으로부터 결속형·가교형·연계형 사회적 자본 형성의 매개 역할을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전략적 차원에서 모든 유형의 사회적 자본 형성의 플랫폼 역할을 하는 ‘지역공동체주축조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역공동체주축조직은 정부와는 독립적으로 지역공동체 구성원이 주도하면서 지역의 의제 발굴과 해결책을 모색하는 다(多)목적을 가진 결사적(結社的) 성격의 주민조직이다(CLES, 2009). 지역공동체주축조직은 <그림 2>에 제시된 기능을 수행하면서 결속형·가교형·연계형 사회적 자본 형성을 주도하는 중추조직 또는 가교조직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림 > 지역공동체주축조직의 기능 | 자료: CLES(2009)
- 읍면동 주민자치회의 제도적 성격과 공공가치 공동창출과의 연관성
현재 한국의 읍면동 단위의 지역공동체주축조직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 주민자치회이다. 주민자치회는 2010년 제정된 「지방행정체제개편에 관한 특별법」(이하 ‘특별법’)에 근거를 두고 “풀뿌리자치의 활성화와 민주적 참여의식의 고양”을 목적으로 도입된 제도이다. 특별법 제정 이래 주민자치회의 학술적·제도적 논의는 풀뿌리주민자치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제도 설계를 위한 상상력을 촉발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2013년 시작된 시범사업 초기 주민자치회는 기존의 주민자치위원회와 차별성을 갖지 못한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2017년 마을계획 및 주민참여예산제와 연계한 서울시 시범사업을 시작으로 제도의 진화과정을 통해 주민자치회는 기존의 읍면동 자생단체 또는 주민자치위원회와는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주목할 것은 주민자치회의 제도화 과정에서 접목된 많은 제도가 공공가치의 공동창출 양식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표 3>은 현재 읍면동에서 주민자치회와 관련해 실시하거나 향후 도입 가능성이 큰 제도들을 공동창출 양식에 따라 분류한 것이다. 표에서 보여주듯이 주민자치회 중심의 풀뿌리주민자치를 위해 도입한 제도들이 사실상 공동창출의 양식을 망라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구체적으로 주민자치회가 주도하는 마을의제 발굴과 주민총회 의결을 거친 마을계획의 수립은 공동코미셔닝의 공동기획으로 분류할 수 있다. 주민자치회가 주민참여예산제의 읍면동 지역회의의 역할은 공동코미셔닝의 서비스 우선 순위순위 결정의 의미가 있다. 일부 지방자치단체의 경우 주민세를 활용해 주민자치회의 재정지원을 하는 한편, 세종특별자치시의 경우는 ‘자치분권특별회계’와 같은 제도를 도입해 예측이 쉽고 유연한 방식으로 주민자치회를 지원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공동코미셔닝의 서비스 공동재정 지원으로 분류할 수 있다.
많은 주민자치회가 마을계획 또는 주민참여예산제를 통해 도출된 의제 또는 사업과 관련해 해당 분야의 공공 및 민간분야의 전문가를 초빙해 리빙랩 방식으로 문제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주민자치회 주도로 시설 또는 프로그램의 설계과정에서 주민의 아이디어를 개진하고 전문가와 상호학습할 수 있는 활동무대를 만드는 노력은 공동창출의 공동설계 양식에 부합한다. 또한 주민자치회가 주도적으로 참여해온 기존 주민자치센터의 관리와 읍면동 단위의 추가적인 공유공간을 확보해 관리하는 사례들은 공동전달의 서비스 공동관리 양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편, 공동전달의 서비스 공동수행의 양식은 최근 도입된 자치경찰제와 연계해 파출소 또는 지구대와 연계해 자율방범 활동을 활성화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다양한 사회복지 대상에 대하여 주민자치회가 사회복지전문가의 지원 속에서 돌봄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례들도 서비스 공동수행에 해당한다. 끝으로 공동평가는 주민자치회 주도로 설문조사, 온라인 또는 대면 방식의 토론을 통해 마을계획의 프로그램 또는 읍면동을 포함한 지방행정 서비스에 대한 주민들의 평가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공동창출 양식 |
주민자치회 관련 제도 예시 |
공동코미셔닝
|
정책의 공동기획 |
마을(자치)계획/주민총회(숙의적참여)
읍면동 행정협의회 |
서비스 우선순위 결정 |
마을 계획과 연계한 주민참여예산제 지역회의 |
서비스 공동재정지원 |
주민세 환원
마을기금 조성
자치분권회계 및 주민세율 조정권 부여 시도(세종특별자치시) |
공동설계 |
주민참여형 마을 놀이터 주민자치센터 등의 시설 설계 및 관리
주민자치센터 교육 프로그램 설계 및 관리 |
공동전달 |
서비스 공동관리 |
주민자치센터 관리
공유공간 확보 및 관리 |
서비스 공동수행 |
공동체 기반 돌봄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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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곽현근(2022: 235)를 보완
- 공공가치 공동창출을 위한 주민자치회의 제도화 모형
이상의 논의를 토대로 공공가치 공동창출 관점의 주민자치회 생태계 기본모형을 제시하면 <그림 2>와 같다. 그림은 주민자치회가 공동창출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실천에 옮기는 구체적인 양식과는 별도로 읍면동 단위의 공동체성 강화를 위한 사회적 자본 형성의 플랫폼 역할에 초점을 둘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주민자치회의 사회적 자본 형성을 위해서는 민초의 공간과 초대된 공간의 두 가지 활동무대를 고려해야 한다. 우선 민초의 공간은 주민의 자기조직화를 위한 공간으로 정부의 개입 없이 주민들 사이의 소통과 실천의 활동무대이다. 민초의 공간에서 초점을 두어야 하는 사회적 자본은 ‘결속형’과 ‘가교형’이다.
<그림 > 공공가치 공동창출을 위한 주민자치회의 역할 모형 | 자료: 필자 작성
<그림 3>은 주민의 동질성의 여부를 장소(place)를 기반으로 분류한 것에 기초한다. 즉, 읍면동보다 작은 마을 규모의 장소는 비교적 비슷한 사회적 배경을 가진 주민들이 모여 살면서 규모가 큰 읍면동보다 상대적으로 구성원이 동질적일 가능성이 크다. 반면, 읍면동 안에는 서로 이질적인 사회경제적 배경과 관심사를 가진 다양한 마을이 존재할 수 있다. 장소 중심으로 생각할 때, 읍면동 주민자치회의 사회적 자본 형성 전략의 핵심은 마을의 규모에 따라 결속형과 가교형을 분리해서 접근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주민자치회는 읍면동 전체 단위를 중심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작은 마을 단위의 결속형 사회적 자본의 촉진과 읍면동 단위의 가교형 사회적 자본의 촉진에 초점을 둘 수 있다. 무엇보다 주민자치회가 스스로 공동체주축조직 또는 플랫폼의 역할을 인식한다면, 작은 마을 단위의 공동체 사업을 직접 주관하는 대신 기존의 마을공동체 단체나 조직을 활용하거나 지원하는 방식으로 결속형 사회적 자본을 강화해나갈 수 있다. 읍면동 수준에서는 규모의 경제를 고려한 사업을 설계하면서 다양한 마을공동체 단체나 공식기관들 또는 서로 다른 지역사회 리더들을 한데 모아 네트워크화하는 방식으로 가교형 사회적 자본 형성에 공헌할 수 있다.
주민자치회가 공동창출의 양식과 관련된 활동을 추진하면서 민초의 공간을 의식하며 결속형과 가교형 사회적 자본 형성을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일 때 읍면동의 대표 주민조직이자 중추조직으로서의 위상을 쌓을 수 있다. 또한 사회적 자본의 관점을 넘어 인적 자본의 측면에서 보면 마을 단위의 결속형 사회적 자본을 이끌어본 경험이 있는 지역활동가나 리더들이 읍면동 주민자치회의 위원이 되는 것이 좀 더 현장 중심적이고 관계 지향적인 주민자치회 활동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공식적으로 지방정부와 주민자치회가 머리를 맞대는 초대된 공간에서는 적극적으로 공동창출 양식이 요구하는 다양한 제도실험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 현재 주민자치회가 기본적으로 관여하는 마을계획과 주민참여예산제 지역회의가 ‘공동코미셔닝’ 양식을 대표한다면, 공동설계, 공동전달, 공동평가의 양식과 관련해서도 적극적으로 주민자치회를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공동창출 양식에 기반을 둔 주민자치회와 행정조직의 상호작용과 파트너십 형성은 연계형 사회적 자본의 형성에 공헌한다.
공동창출을 위한 주민자치회의 역할과 지방정부와의 협력의 조건과 방향을 형상화하면 <그림 4>와 같다.
<그림 > 공동창출을 위한 주민자치회의 역할과 협력 방향 | 자료: 필자 작성
<그림 4>는 공동창출을 위한 초대된 공간이 정부가 주민자치회를 초대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공동창출의 공간은 지방정부의 필요와 요구뿐만 아니라 주민자치회로 대표되는 지역공동체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 열릴 수 있다. 주민자치회의 독립적 지역공동체 활동에 가치를 부가하기 위해 주민자치회가 공공조직의 지원을 요청하고 공동의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 것은 보충성 원리에 기초한 새로운 초대된 공간의 의미를 갖게 된다. 이렇게 열린 초대된 공간에서의 공공조직의 역할은 주민자치회(지역공동체)의 자조적 활동과 역량을 보강하고 지원하는 성격을 띨 가능성이 크다. 초대된 공간의 참여 주체의 관계를 대등하고 쌍방향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접근할 때 그만큼 초대된 공간에서의 연계형 사회적 자본이 형성될 가능성이 커진다.
결론
본 연구는 공공가치의 공동창출의 이론적 배경을 소개하고, 효과적인 공동창출을 위해선 참여 공간 분류와 보충성 관점의 참여 공간 연계의 필요성을 이론적·규범적 차원에서 제기하였다. 또한 본 연구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추진되는 읍면동 주민자치회 관련 제도들이 공동창출 패러다임의 실천 양식들과 부합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끝으로 앞의 이론적 논의에 기초한 공공가치 공동창출을 위한 주민자치회 제도화 모형을 제시하였다. 본 연구의 이론적·규범적·처방적 논의가 향후 우리나라에서 공동창출 패러다임이 뿌리내리고 주민자치회가 읍면동 공동창출의 핵심 동반자로 자리 잡는데 작은 밑거름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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