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격한 사회변화와 더불어 다양한 문제들이 도출된다. 사회변화의 부정적인 측면들이 도드라져 보일 때쯤이면 어김없이 그 부분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들이 등장한다. 그 대안들은 때로는 학자들에 의해서, 때로는 국제적인 무대에서 다자간 협의체를 통해 등장하기도 한다. 오랜 역사를 가진 다보스포럼은 특히 세계의 정치 경제계 인사들이 참여하여 당면한 전지국적 문제들을 토론하고 나름의 대안들을 제시하곤 하였다. 그 가운데 지난 2018년에는 ‘균열된 세계에서 공동의 미래 창조’(Creating a Shared Future in Fractured World)를 핵심 주제로 삼았다. 우리가 특히 기억해야 할 내용 가운데 하나가 ‘사회적 불균형’에 관한 부분이고 이런 문제제기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대안으로 제4섹터의 개념이 확실하게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제4섹터란 기업 활등을 하면서도 사회적 목적을 추구하는 일련의 ‘사회적 경제 조직’들을 의미한다.
그동안 우리는 1섹터 정부, 2섹터 기업, 3섹터 비영리조직(Non Profit Organization; NPO)이나 비정부기구(Non Governmental Organization; NGO) 정도로 섹터를 구분해 왔다. 제1섹터는 정부의 영역이다. 1섹터인 정부는 국민을 대상으로 의무적으로 세금을 징수하여 그것을 재원으로 사회전체의 이익을 극대화 하는 것이 주된 역할이다. 이와 달리 2섹터는 소유주와 주주 등 이해 당사자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목표라 할 수 있다. 제3섹터는 이보다 더 다른 측면에서 활동한다. 사회 일반의 공익을 목적으로 일하는 것이 바로 3섹터이다. 때로 이들은 ‘시민사회’라는 말의 동의어처럼 이해되고 있다.
언급했던 제4섹터의 개념은 이윤을 추구하면서도 공공선을 동시에 추구하는 새로운 영역을 의미한다. 이 영역 안에는 사회적 기업 뿐 아니라 시장에서는 수익을 내며 동시에 공익을 위해 그 수익을 사용하는 기업(사회공헌을 위한 기업의 재단 등)이나 이들을 지원하는 정부부처와 연구기관 등도 모두 이 부분에 포함된다.
이렇게 섹터들은 저마다 문제해결 방법이 다르다. 살펴본 바와 같이 정부는 정부의 방식대로, 기업은 자신들의 수익이 저해되지 않는 선에서, 비영리단체들은 전혀 영리를 추구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리고 이제야 서서히 자리잡아가는 제4섹터는 공공선을 추구하면서도 지속가능성도 고민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책을 논하고 있다.
지난 2019년부터 맹위를 떨친 코로나의 대유행(Pandemic)이 2022년 말까지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는 초유의 상황이 전개되면서 매우 이례적인 현상을 목격했다. 코로나로 인한 팬데믹은 그간 우리 사회를 지탱해주던 제1섹터의 역할에 의구심을 갖게 했다. 범정부 차원에서 백신을 수급한다든지 호흡기를 보호하기 위한 마스크 관련한 정책을 주도한 것은 사실이나 실제로 시민들의 삶의 근저에서는 별반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말 그대로 팬데믹은 전세계적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간 누려왔던 다양한 사회서비스는 물론 모든 분야가 멈춘 듯 했다.
심지어 마스크 대란이 일어나 품귀 현상을 거쳐 배급에 가까운 방식으로 구매하는 상황까지 연출되었다. 빈곤계층이나 노년층,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사회적 약자들은 이마저 쉽지 않아 사용했던 마스크를 반복 사용하거나 외출 자체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하기도 했다. 이때 다양한 형태의 지역의 공동체들이 등장했다. 당시 ‘마을공동체’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하던 전국의 활동가들과 지역의 크고 작은 마을공동체에서는 나름의 방식으로 마스크를 직접 제작하였다. 그리고 소량이나마 생산된 마스크는 그 지역의 소외계층과 사회적 약자들에게 전달되었다. 이뿐이 아니다. 팬데믹은 지역경제 생태계까지 와해시킬 정도였다.
특정 작물의 생산자들은 팬데믹 상황에서 집합금지로 인하여 판로가 막혀 부도직전에까지 몰렸다. 2월초에서 3월초까지는 졸업과 입학 시즌인데 집합이 금지되고 행사도 온라인으로 간단히 진행되니 예년이면 활황이었을 꽃 생산자들은 공들여 키운 꽃들을 출하할 수 없는 지경에 놓였다. 이때 이런 사정을 아는 도시의 공동체에서는 그 꽃을 구매하여 마을생태계에서 소비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했다. 비록 큰 금액은 아니지만 시민들이 직접 나서서 막막해 하는 작물 생산자들을 돕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현상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동안 우리는 사회가 겪고 있는 다양한 문제에 대하여 여러 섹터들이 나름의 역할을 하며 헤쳐 나왔다. 정부는 정부의 역할을 해왔고 기업도 도움이 되곤 했다. 비영리기구나 비정부 기구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팬데믹과 같은 초유의 사태에서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직면하였다. 도리어 우리 주변에 있는 작은 규모의 공동체에서 발 빠르게 움직이며 문제를 해결해 나가려고 했고, 피부에 와 닿는 실효성 있는 방안을 강구해왔다. 이런 일들이 어떻게 가능했었나 반추해보면 그간의 몇 가지 정책들이 시민들로 하여금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갖고 움직이도록 추동한 것으로 보인다.
10년이 조금 넘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시군구 단위에서 다양한 형태의 마을공동체들이 등장했다. 처음에는 공모사업을 비롯한 정책 안에서 활동하게 되었고, 시간이 흐르며 지역을 중심으로 생태계가 형성되었다. 마을공동체는 특정 활동에 얽매이지 않고 각각의 시민주체들이 원하는 활동 방향을 정하고 유연성을 가지고 활동에 임한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작은 단위의 마을공동체들은 3인에서 5명 정도로 구성되는 초기의 구성원 규모에 비하면 매우 다양한 분야에 흥미를 가지고 활동한다. 기후위기를 비롯한 큰 의제들에 관한 관심도는 매우 보편적이며, 사회적 고립이나 고령화 문제, 마을의 일자리 등과 같은 분야에도 관심을 갖는다. 요즘은 마을에 청년들이 정착하지 못하고 있는 여러 가지 이유에 대해 고민하기도 한다. 중년 1인 가구나 자립을 준비하는 청년들도 부쩍 관심이 더해지는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주제들과 관련하여 마을공동체들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다양한 해결 방안을 고민한다. 정부나 기업이 미처 손쓰지 못하는 사각지대는 물론이고 피부에 와 닿는 정책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지역의 현안들, 심지어 전 세계가 함께 고민하고 있는 문제인 환경과 기후위기와 미래 에너지 등에 관한 내용들도 곧잘 이야기 나누고 나름의 실천 방안들을 마련하고 행동에 옮긴다. 이제는 그야말로 새로운 섹터가 등장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의식 있는 시민 그리고 연결되어 있는 마을공동체와 그 생태계를 포함할 섹터는 과연 어디인가? 과거에는 시민사회를 비영리기구 혹은 비정부기구에 포함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시민사회는 일종의 아젠다(agenda)를 중심으로 시민을 대표하는 기구였다. 환경과 관련한 시민들이 모이는 ‘환경운동연합’이나 참여연대, 경실련 등이 우리에게 익숙한 시민단체들이다.
제3섹터로서의 시민단체는 말 그대로 비영리, 비정부를 표방하는 단체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구성에 있어서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가 필수적이다.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라곤 하지만 많은 경우 금품을 후원하는 정도로 참여하고 실제 일상에서의 참여는 쉽지 않다. 적극적인 시민활동가가 아니라면 시민단체의 실행단위 활동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보니 제3섹터로서의 시민단체는 그동안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실효적인 활동을 해왔음에도 ‘시민 없는 시민단체’라는 오명을 쓰고 있다. 자유로운 시민들의 자발적인 집합체로서의 역할을 자임해 왔으며 여러 면에서 사회를 변화시키는데 일조를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시민들은 제3섹터로서의 시민단체에 국한되지 않는다. 물론 여전히 수 백 개의 시민단체들이 나름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만 시민들 개개인은 새로운 형식의 시민사회를 구성하고, 의식 있는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이어가고 있다. 시민들은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구성된 작은 단위의 공동체들과 그들로 이루어진 생태계, 그리고 그 속에서 활발하게 시민으로서 활동하는 까닭에 이전의 제3섹터에 포함되어 있는 ‘시민단체의 일부분으로서의 시민’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새로운 섹터를 구성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지난 10여 년 동안 지역마다 마을마다 다양한 시민들이 주축이 된 마을공동체가 생성되었고, 이들 공동체들이 결합한 자치구 단위의 네트워크들도 만들어졌다. 어떤 곳에서는 작은 규모의 마을공동체이 서로 연결되어 새로운 형태의 시민단체들이 만들어졌으며, 이들은 그간의 제3섹터로서의 시민단체들과 목표는 유사하지만 더 지역 친화적이고 하나의 의제에 얽매이지 않고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많은 문제 해결을 위하여 직접 활동하기를 꺼려하지 않는다.
과거 시민단체에 소속된 ‘시민단체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것과 지금 마을공동체를 중심으로 하는 활동은 어떻게 다른가? 적어도 두 가지 면에서 확연한 차이가 있다. 하나는 의제에 관한 내용이다. 제3섹터에 포함된 시민단체들은 각각 단체의 특성에 맞는 의제를 중심으로 활동한다. 기후위기나 생태와 환경 등의 활동을 하는 단체들이 있고, 경제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단체들도 있다. 참여연대 같은 경우에는 더 포괄적인 시민정치활동들을 진행한다. 이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그동안 견지해 왔던 의제들을 넘어서지 않는다. 비록 다양한 주제들이 중요하고, 중요한 의제들이 더 많아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각각의 시민단체들이 그 모든 문제에 천착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지역을 거점으로 하는 마을공동체들과 그들의 연대로서의 ‘지역 중심의 시민단체’는 어떤 일, 어떤 의제에 관심이 많은가? 각각의 마을공동체가 속한 지역의 소소한 의제들로부터 지구의 환경까지 커다란 의제들도 거론된다. 그야말로 모든 분야가 의제가 될 수 있다. 동네에서 살아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모든 문제들에 관하여 마을공동체에 소속된 시민들은 편한 방식으로 의견을 주고받고, 의논된 내용을 토대로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긴다. ‘지구의 날’과 관련해 소등 행사를 진행하는 과정만 보아도 예전과 여실히 다르다. 10여 년 전만 해도 캠페인을 주최하는 주변 외에는 참여하는 단위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참여의 범위나 행사의 취지 등이 매우 보편적으로 알려졌을 뿐 아니라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 의식이 있어서인지 아파트 단위나 동네 단위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그간 이루어진 마을공동체 중심의 생태계와 마을 운동을 빼고는 설명하기는 어렵다.
제3섹터로서의 시민사회와 오늘날의 시민활동이 다른 두 번째 면은 ‘지역적 생태계’를 표방한다는 점이다. 광역단위, 때로는 전국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그간의 시민단체들과는 달리 근래에 만들어진 시민단체들은 철저히 지역을 중심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활동하는 영역이 아무리 넓더라도 자치구 단위를 넘어서지는 않는다. 말 그대로 마을생태계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시민단체다보니 당연히 활동의 영역이 주된 활동 당사자들의 지역으로 더 촘촘해진 것이다. 지역을 중심으로 하다보면 의제도 제각각이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겪는 공통의 관심사에도 적극적이다. 자치구나 동단위로 활동하지만 의식 있는 시민으로서 전 지구적 의제에도 관심이 많다. 지금까지 이런 섹터, 이런 부류는 없었다. 유연하고 활동적이며 적극성을 띠고 있기에 비록 작은 단위의 생태계를 이루고 있지만 그들 스스로는 전 세계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식을 충분히 하고 있어서 지구의 미래를 걱정하는 일이 전혀 낯설지 않다.
이런 이들을 포괄하는 섹터는 없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제3섹터는 지금 등장하여 활동하고 있는 이들을 담기에는 그 차이가 매우 크다. 비록 존재방식 자체가 비영리, 비정부의 형태를 띠기는 하지만 그 활동방식은 완전하게 새로운 방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이들은 어쩌면 불확실한 미래 사회를 주도할 수 있는 새로운 섹터가 될 수 있다. 깨어 있는 시민들과 그들이 토대로 삼고 있는 마을생태계, 그리고 그 지역을 중심으로 연결된 네트워크 등등은 이제 새로운 문제 해결 세력으로, 그 대안으로 등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